-항상 편지를 읽고 소중한 감상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레터에 분량 문제로 짧게 소개하면서도 좋은 감상들을 충분히 함께 나누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요. 해당 회차 레터에 관한 일부 의견들을 선정해 아카이빙해보고자 합니다.(이전 회차들에 대한 의견들도 조만간 아카이빙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잘 읽었다” 등의 짧은 감상 혹은 개인적인 지지의 말들도 항상 굉장히 감사하게 받아보고 있고 큰 힘이 됩니다.

-닉네임을 남겨주시지 않은 경우 ‘무명’으로 통일합니다.


👤타미 = 뉴스를 매일 훑어보고 다루는 일을 하면서 진절머리난다고 생각했어요 (이직하고 싶다고 생각..) 뉴스가 불쾌감을 준다고 생각해서 업무적으로 접하기 전에는 전혀 뉴스 (특히 온라인 상)를 소비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오늘 뉴스레터 읽고 나서 확실히 내가 좌절과 우울만 줄 뿐인 뉴스라고 치부했던 거, 내 일이 아니여서 절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해서였을까 곱씹게 되더라구요.뉴스의 전달 방식이 객관적이어야 하기에 어떤 추체이든 대상화하는 느낌 때문에 싫은 것도 있어요. 단순히 0명 사망… 이런 식의 처리(?)는 그 이면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으니까 안타까움보다는 ‘듣기 싫은 소식‘으로 치부하기 쉽달까요. 그치만 또 전달 속도와 정확성이 요구되는 뉴스 본연의 속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콘텐츠 플랫폼을 다루는 업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대중을 상대로 한 뉴스는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내가 운영하는 곳의 콘텐츠는 지금 어떤가 돌아보게 되네요.

⏩김스피 = 뉴스를 많이 접하는 직무에 계신가보군요 ㅠㅠ 실은 ‘뉴스는 스트레스다’라는 말에 대체로, 실은 뉴스를 다루는 직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번 회차를 쓰기 전에도 주변에 여럿 물어봤는데, 오히려 기자들 중에서도 자기 출입처(담당 부서)의 뉴스 외에는 다른 뉴스는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고요.

저번 회차의 주제는 실은 너무 큰 주제(?)라 - 한번의 글로 완결될 수 있는 질문은 아니고 - 계속 품어가야 할 질문일텐데요. 또 한편, 나아가 타인(대중)의 이야기를 왜 관심갖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 중입니다 ;) 현재로서 막연하게 드는 생각은, 마치 ‘관심 보험(혹은 계)’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상대적으로 내가 어렵지 않은 상황에서는 남의 고통을 잘 살피고 거기에 연대하다가도, 내가 나쁜 일을 당했을 때(꼭 사고 뿐 아니라 시스템적인 부조리 등)도 사회가 함께 ‘관심있게 바라봐주는’ 것처럼요.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절망을 바라보기 어려운만큼, 서로 등을 긁어주듯(?) 어려울 때 서로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실은 지난 회차 에세이에선 ‘약자’가 마치 ‘우리’와 분리된 사람들인 것처럼 쓰긴 했는데, 시스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삶의 어느 국면에서도 약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중산층’이라는 관념은 허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모두 자신이 약자가 아니라고,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야말로 각자도생의 지옥이겠죠. 아직은 막연한 생각인데, 언젠가 관련해서 회차를 다루어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평소 보는 콘텐츠에 대해서 추가 질문주셨는데요…ㅎㅎ 실은 그렇게까지 막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고있진 않습니다. 대신 어떤 인상적인 걸 볼 때 항상 출력을 생각하면서 그때그때 메모+생각정리를 해두는 편이예요. 주로 뉴스레터는 제목 위주로 보고(어떤 트렌드가 있는지), SNS에서 다른 사람이 공유해준 기사, 칼럼 등을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뉴스레터 쓰는 과정 관련해서 조촐한 강연(수다?)을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들을 풀어놓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실은 뭐, 그냥 대체로 덕후가 책 읽는 얘기가 되겠지만요(…🤣))

👤깨몽 = 저도 '긍정적인 소식(뉴스)'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매체에서 전하는 소식 가운데는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지면을 채우기 위한 아무 대책없는 부정적이고 자극적이기만 한 소식들도 있습니다.('뭔가 해결책을 생각해 봐야지'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인 소식들...) 그런데, 제가 부정적인 건지 몰라도 전체 사회를 봤을 때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소식들이 정답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다른 얘기로, 왜 인류는 매번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고 손해를 보고서도 또 전쟁을 일으킬까? 전쟁 혹은 소란이 있을 때는 사람은 '평화'를 갈구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시기가 좀 길어지면 뭔가 새로운 자극을 찾게 되더라고요... 긍정적인 소식? 아마도 모든 매체가 그런 소식만 전하기만 하면 인류는 마음 한 구석에 또 불안함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분명 어디선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텐데, 왜 이리 조용한 거야? 왜 이리 불안하지...?) 역시 마침내는 '사람'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몇 분이서 글을 내시는지는 모르겠지만(혹시 한 분?) 필진을 조금 늘려보면 늘 내기도 수월하고 조금은 더 다양한 관점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관점에 문제가 있거나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

⏩김스피 = [‘그래서 뭐 어쩌라고!’인 소식들]이라는 말에 엄청 공감했습니다 ㅎㅎ 실은 방금 다음 포털 뉴스들 보다가 눈을 찡그리면서 비슷한 마음의 소리를 외쳤던…;;🤣 그런 뉴스들이 너무 많죠ㅠㅠ 실은 요새 우연히 문득 든 생각이 있는데, 제가 주로 ‘글 속 한문장’에 넣는 칼럼 등은 웬만하면 포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아마도 ‘사건’이 아니라서 눈을 덜 끌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어떤 글을 어떤 ‘매체’를 통해 보느냐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경우엔 대체로 종이신문에서 해찰거리를 찾고 그걸 온라인에서 다시 뒤져보는 편이거든요. 그래야 포털에 안 뜰만한 안 자극적인(?) 글들을 찾을 수 있어서요. 왜 이렇게 번거로운 종이 덕후일까! 생각해보는데, 실은 종이 덕후라기보다는 이런식으로 자극적인 글을 피해 정말 읽고 싶은 좋은 글을 찾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말씀주신 것처럼 어쨌든 사람들은 부정적인 소식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그런 소식이 없으면 궁금해지는 게 본성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그 와중에도 정말 필요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글들이 더 많이 유통되는 생태계를 고민합니다.

(+김스피는 한명입니다! ㅎㅎ 앞으로 인원이 늘어날진 모르겠는데, 저는 그냥 인스피아를 ‘뉴스레터 서비스’라기보다는 한편의 칼럼, 서평 혹은 에세이 같은 느낌으로 쓰고 있어서 굳이 인원을 늘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나중에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원이 늘어날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김스피의 업무강도가 극악하다는 뜬소문(?)이 있어서 지원자가 없을 것 같습니다…😬)

👤ㅅㄹ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를 읽고 있었어요. 버틀러는 팬데믹을 고찰하면서 우리가 호흡하기에 존재하고, 그렇기에 전염되고 전염시키는 존재이기에 이 팬데믹에 대해서 닫힌 감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 널린 '비극'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어어야 하며 우리를 우리로 살게 하는 삶의 조건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요.(너무 급하게 써서 중언부언입니다만.) 마침 기자님도 '좋은 뉴스만 있는 세계는 ‘우리’ 대신 ‘나’만 있는 세계다'라는 요지의 문장을 써주셔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멸망이 말 그대로 눈앞에 닥친 지금 시대에, 다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거 모른 척하자'는 느낌도 지배적인 거 같은데요. 우리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생각해야 한다.. 지치고 힘들지만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버틀러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전에 이미 여러 다른 존재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곳"이라는 세상에서요... 말이 길었습니당. 김스피 화이팅.. +)추천 콘텐츠: 앞서 말씀드렸던 주디스 버틀러의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입니당.. 그리고 최근에 방송인 타일러 씨가 기후위기에 대해 언급한 영상도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트위터에서 보셨겠지만요! https://youtu.be/G9ySe7NfN30

⏩김스피= 오오 흥미로운 책이네요. 설명해주신 내용을 읽다보니 예전에 봤던 <호흡공동체>(링크)라는 책 제목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워낙 ‘각자도생’ ‘누칼협’…을 외치다보니(특히 오늘 레터에서 간접적으로 다루긴 했지만, ‘교육-경쟁’에서는 더더욱요) ‘우리’라는 단어 자체가 참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팬데믹과 폭염(기후위기) 등은 결국 강제로(?) 우리가 ‘우리’임을 가르쳐주는 계기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우리’에 대해서는 위의 [타미]님 글에 피드백을 남겼듯, 언젠가 한번 좀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화이팅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