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편지를 읽고 소중한 감상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레터에 분량 문제로 짧게 소개하면서도 좋은 감상들을 충분히 함께 나누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요. 해당 회차 레터에 관한 일부 의견들을 선정해 아카이빙해보고자 합니다.(이전 회차들에 대한 의견들도 조만간 아카이빙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잘 읽었다” 등의 짧은 감상 혹은 개인적인 지지의 말들도 항상 굉장히 감사하게 받아보고 있고 큰 힘이 됩니다.

-닉네임을 남겨주시지 않은 경우 ‘무명’으로 통일합니다.


👤무명 = 세로 이야기! 저도 고민하고 있었어요. 음 약간 글의 취지와 다를 수도 있는데, 저는 어젯밤 유튜브에서 궁금한이야기 Y에 소개된 세로 영상을 봤어요. 세로의 사육사 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취가 잘 되지 않는 동물이라,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그분의 눈물을 마주하면서 이 영상의 중심이 그 사람의 걱정과 안도에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로는 아침마다 캥거루를 찾아갔다고 하죠. 세로와 캥거루의 아침 인사와 놀이를 왜 사람들은 싸움이라고 보았을까요? 이 또한 인간 삶의 반영이고, 짝짓기로 행복을 결말 지으려는 것도 강력한 반영이겠지요... 도심에서 긴장해 있는 세로의 사진은 개인적으로는 참 슬프게 다가왔어요. 정말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저는 어떤 서사로 이 사건을 기억하고자 하는 걸까요? 인간에게도 원래 살던 곳이 있고, 원래 습성이 있고, 원래 먹이가 정해져 있다면 인간들의 삶은 보다 겸손했을까요? 나에게도 제자리에 대한 인식이 있고 지향이 있다면 좋겠다 생각해보기도 하는 시간입니다. +)이그노런스 책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사례사 중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편견을 깨는 시도들을 만나 기뻤어요. 머리에서 마음이 생기는 경로(표현이 정확하진 않은 것 같지만) 라는 시각이 참 좋았어요. 이성과 감성을, 머리와 몸을 나누는 지긋지긋한 경계가 이렇게 새롭게(아니 제가 이제 알았을 뿐이죠ㅜㅜ) 허물어진다는 것이 아름답고, 동물보다 상위에 있다고 고집하는 종에 속한 나란 존재는 과연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두렵기도 합니다. 참,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하는 언어와 상상력에 대해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나누어 보려고요! "그러나 시인들의 언어 속에서만은 이따금씩 침묵과 연결되어 있는 진정한 말이 나타난다. 그것은 망령과도 같다. 자신이 다만 하나의 망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며, 자신은 다시금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비애로 가득 찬 망령인 것이다. 시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말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리는 어두운 구름이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46쪽 시인이 꼭 문학의 한 장르인 시만을 쓰는 시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김스피님의 글에서도 저는 시적 언어를 보고 느낀답니다. 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인 우리들, 이 삶을 잘 살아내고 떠날 수 있음 좋겠습니다 : )

⏩김스피 = 세로가 오토바이를 탄 배달기사와 주택가에서 맞닥뜨린 그 사진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세로와 관련된 ‘이야기’들도요…사실 세로 ‘탈출 사건’이 벌써 시간이 좀 흐른 일이라 저번주에 레터를 쓰기 위해 관련 뉴스를 검색해보는데 세로가 <동물원의 인기스타>가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참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동물권과 관련된 회차를 다루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거의 1년 전부터 있었습니다만😹 파고들수록 정말 어렵네요.

+<이그노런스> 책 정말 좋아하는 책인데,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기쁩니다! 사실 저번 회차를 동물권으로 다룰까 고민을 하면서 예전에 정말 재밌게 읽었던 <동물에 반대한다>(링크)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는데요. 2007년 책이라 절판되어서 도서관에서 말곤 구하기 어렵겠지만 나중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인간 중심의 동물 의인화, 도구화 관련해서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책이었습니다.

👤김피망 =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셨는데, 김스피 연구자님의 레터 역시 한 편의 서사가 담긴 것 같아서 잘 읽히고 생각해볼 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또 우리가 그냥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본능이 있다보니, 서사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편으로 이 서사의 왜곡에 정말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사의 강한 영향력 사례 중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사이비에 대해 다룬 한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한편, 레터 중간에 동그라미와 세모가 왔다갔다 하는 영상을 저도 보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구진이 이 영상을 보고 나서 사람들에게 ‘느낌’에 대해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봤나요?”라고 물어봤다면 다른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요? ‘무엇을 보았는가’ 물어봤다면 ‘그냥 세모랑 동그라미가 왔다갔다 하네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더욱 많았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느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에서부터 이미 서사를 이야기해달라고 의도한 바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영상을 보다보면, 충분히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세모와 동그라미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한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연구와 레터를 보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항상 몸과 마음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김스피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레터를 준비하면서 가장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고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가 서사(이야기)를 읽고 있다”라는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서사를 찾고, 서사를 짓고, 서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성적으로 동물권, 자연, 법리 등의 문제를 본다고 할 때도요. 우리가 스토리텔링 애니멀으로서의 본능을 완전히 버리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부분을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느꼈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말씀 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마지막에 레터를 대폭 수정하다보니 미처 그 부분을 수정을 못하고 그냥 보내드렸습니다 ㅜ 안그래도 최종 확인 과정에서 ‘느꼈다’는 표현이 어딘가 좀 어색해서 해당 아티클 관련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는 페이지를 찾아봤었는데 describe what happened~(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기술해보라)라는 식으로 적혀있더라고요. 그래서 고쳐야지…하다가 깜빡하고 말았습니다.ㅠ 즉, ‘느꼈다’ 대신 피망님이 말씀주신 대체 표현이 좀더 원문의 의도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이미 발송 된 레터는 수정이 불가능해서, 홈페이지 아카이브에선 수정했습니다. 다음부턴 한번 더 주의하겠습니다!!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결국 ‘느꼈다’는 저의 잠재의식(편견?)을 반영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전공F맞은대학생 = 사실, 이야기 중독인 사람은 과학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다른 결론을 이야기해서가 아니라, 과학적 과정이 이야기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시간당 운동량의 변화임을 증명하는 두 경로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고전 역학에서 물체의 운동 상태(방향과 정도)를 나타내는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는데요. 왜 이렇게 나타낼까요? 무거운 물체(무게는 질량에 비례합니다.)와 빠른 물체가 운동량이 크다는것은 직관적으로 와닿으니 저렇게 나타내는것 같다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힘은 질량x가속도로 나타내는데요, (여기서 가속도는 시간당 속도의 변화입니다.) 얼핏 봐서는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지만 물체를 쭉 밀면 시간에 따라 점점 빨라지거나 방향이 바뀐다는 걸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속도가 변한다는 것은 운동 상태, 즉 운동량이 변하는 것이겠죠? 따라서 힘은 시간당 운동량의 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제가 쓴 위의 서술은 어느정도 엉터리입니다. 자연의 운동을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에 짜맞춘 것에 불과하며 과학적 방법론 역시 없습니다.실제 과학에서는 질량을 물체가 운동의 변화에 저항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속성으로 정의하고 시간당 위치의 변화 (위치의 미분)를 속도로 정의하고 운동량을 질량x속도로 정의한뒤, 질량x가속도인 힘이 시간당 운동량이 변화인 이유에 대해 운동량을 시간에 따라 미분하면 "시간당 질량변화x속도+질량x시간당 속도변화"인데 질량은 불변하므로 질량x시간당 속도 변화=질량x가속도=힘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미분의 개념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f(x)의 미분은 x의 미세한 변화 dx가 일어날때 'f(x)의 변화는 dx의 몇배인지' 입니다.) 운동량이나 힘이 왜 저렇게 정의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며 질문해봤자 답도 못해줍니다. 요지는, 저렇게 이야기에 짜맞춰지지 않는 것들은 (구심력이나 운동에너지 등등은 훨씬 심합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지고 답답해진다는것입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도 우리 세상의 불확실함과 일관적이지 못함을 기본으로 깐 채로 경향이나 비율로서 전체 중 일부만을 알려주는데 여기에 의미 부여를 하고 타당한 이야기로 만드는데는 수준 높은 분석과 통찰이 요구되고, 대부분은 후속 연구가 있어야 그나마 뭐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의 개인은 간단히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현상을 이야기 속에 가짜뉴스처럼 녹여내거나 이게 다 무슨 말인가 하며 기억에서 지우는 수가 분명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굳이 완전무결한 결론을 몰라도 저러한 일련의 과정을 찬찬히 보고 '내가 틀릴 수 있다'혹은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건 많다'정도의 태도만 취해도 어느 정도 여유로워지고 객관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말 안통하는 동물의 행동을 모방하듯 본인의 방식으로는 이해도 못하는 과정을 직접 해볼수도 있습니다! (미분만 알면 위의 과정을 직접 쓰고 문제를 풀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도 나름대로의 '양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스피 = 말씀하신 것처럼 과학도 어느정도는 대중에게 전파될 때는 ‘이야기의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우리가 매번 어떤 과학 서술을 도표를 그려가며 이해하고 그만큼까지만 받아들이긴 어려우니까요.) 그럼에도 내가 항상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을 통해 여유롭게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주신 것처럼, ‘이야기중독자’들에겐 이것이 불가능할 것이고요. 위의 연구자님도 말씀주셨지만, <이그노런스>는 질문을 질문으로 열어두고, 무지를 무지로 다룬다는 과학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