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편지를 읽고 소중한 감상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레터에 분량 문제로 짧게 소개하면서도 좋은 감상들을 충분히 함께 나누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요. 해당 회차 레터에 관한 일부 의견들을 선정해 아카이빙해보고자 합니다.(이전 회차들에 대한 의견들도 조만간 아카이빙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잘 읽었다” 등의 짧은 감상 혹은 개인적인 지지의 말들도 항상 굉장히 감사하게 받아보고 있고 큰 힘이 됩니다.

-닉네임을 남겨주시지 않은 경우 ‘무명’으로 통일합니다.


👤토리도 = 핵심은 '공감'이 아니라 '권리'라는 점을 명확히 짚어주셔서 정말 좋았습니다. 소개된 책과 사례들도 정말 감사하게 보았어요. 저희 아버지는 베트남전 말기에 파병되어 참전하셨습니다. 격전지에 계셨던 것 같지는 않았어요. 많은 죽음을 목도하셨겠지만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셔서 궁금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얘기해 주신 몇 안되는 일화 중에 숲에서 '베트콩'과 일대일로 마주친 날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빈손으로 잠깐 나갔는데 상대방은 총이 있어, 멀찍이서 '적군'을 발견한 그 순간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대요. 그런데 총을 든 그도 아버지를 보자 마자 너무 놀라서, 결국 서로 반대 방향으로 혼이 빠져라 줄행랑을 쳤대요. 아버지의 저 일화는 떠올릴 때마다 저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곤 합니다. 조지 오웰을 해찰해 주신 덕분에 오늘 또 한번 떠올려보았습니다.

⏩김스피 = 감동적이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야기네요. 토리도님이 공유해주신 아버님의 사례를 보니 과거 어떤 책을 보다가 인상깊어서 적어두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1차대전 당시 영국군 조지 루펠이 군인들이 ‘허공에다가’ 사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억지로 ‘낮게 쏘라’고 외쳤다고 하네요. 역사가이자 미 육군 준장 S.L.A마샬은 전투중 발사율이 10~20%에 불과했다는 자료를 발표하기도 했고요. 생각보다 사람들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잔인해지기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Juicy = 공감이란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미국, 유럽 지역에거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라크 전쟁보다 많은 공감을 받은 이유는 같은 백인이기 때문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인종이 다른 한국에서도 유독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많은 공감을 이끌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 알게 모르게 있는 백인에 대한 우호적 태도나, 한국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침공이라던가, 언론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태도 등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네요.

⏩김스피 = 사실 한 사람이 모든 것에 공감하긴 어렵겠지만, 항상 이런 공감의 ‘사각지대’를 의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회차였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니면서도 어떻게 그런 부분을 의식해갈 수 있을지가 고민입니다!

👤우롱우롱 = 하나 버릴 것 없이 잘 읽었습니다. 시의적절한 주제를 잘 잡아주셔서 좋았고, 소개해주신 책들이 다 좋네요. <공감병>의 관점은 정말 속이 다 후련하네요. 어떤 정상성을 설정해두고('피해자'의 상을 정해두는 식의) 거기서 미끄러지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질타와 혐오를 내뱉는 차별적 공감의 행태를 보니, 영국의 성노동자 당사자 활동가들이 쓴 <반란의 매춘부>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매춘부야 말로 딱 그에 해당하는 존재들인 것 같아서요. 매춘이 생존을 위한 방편임은 무시한 채 매춘을 하는 이들의 삶을 불법으로 규정해 그들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자발이냐 강제냐를 따지며 공감받을 자격을 판가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런 부분에 대해 성노동자 당사자로서 매춘의 문제는 성노동자의 구체적 현실에서부터 접급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책이라 떠올랐습니다.

⏩김스피 = 보통 (피드백 폼에 적어주시는) 해찰이나 감상 부분만 이곳에 공유를 하고 있고 ‘읽을만한 책 추천’ 영역은 제가 이곳에 함께 공유하지는 않고 있는데, 안그래도 이번 회차 쓰고 나서 <반란의 매춘부> 생각이 많이 나던 차에(최근에 읽었거든요!) 우롱우롱님이 이 책을 읽을만한 책으로 추천해주셔서 깜짝놀라기도 하고 공감이 되어서 특별히 추천해주신 책을 함께 실어보았습니다. 사실 지난 레터에 많은 사례를 직접적으로 넣진 못했지만, [공감받을만하지 않은 사람] 영역엔 우리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매도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뚤어진 누나 = 제가 이때까지 읽은 모든 뉴스레터를 통틀어 가장 울림이 깊은 편지였습니다. 저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외톨이같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쉽게 말해 '양비론자'라고 비난받는 사람이죠. 어떤 주제에서든 이 사람의 이 부분은 공감이 가고, 또 반대편의 주장 역시 이 부분만큼은 맞는 말 갖고, 그래서 갈팡질팡을 여러번 했었는데요... 제 안에서 저도 모르게 불확실했던, 자신감이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정립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양비론자가 아니라, 어떤 주제 앞에서도 최소한의 공감할만한 부분을 찾아내고 인간 대 인간으로써 최소한 존중이 꼭 필요한 영역을 늘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스피 = “양비론자가 아니라[…]최소한의 존중이 꼭 필요한 영역을 늘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사실은 저 역시 어떤 상황에서 어느 한편에 깔끔하게(?) 손을 드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인데요. 그럴 때 그냥 ‘잘 모르겠다. 다 틀렸어!’라고 하고 갈등 상황을 무시하는 것과, 그 안에서도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사려깊게 궁리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정말로 천지차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정말 우리 사회에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사람들은 소외되기 쉬울테니까요.

👤Yull Noh = 안녕하세요, 매일 같이 빨리빨리, 급하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김스피님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문장을 보며 마음에 쉼표를 찍어주는 구독자 입니다. 다른 레터들도 늘 좋았지만 이번 레터는 제가 최근에 계속 하고 있던 고민과 연결되는 부분이라 많은 공감을 하게되어 이렇게 글을 써 봅니다. 결론은 정말 좋았습니다. '좋아요'만이 공감이 아니라는 것,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이미 그들에게는 권리가 있다는 것,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서 그들이 공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특히 서울에 계신 분들, 지하철을 타시는 분들이라면 하나의 기사가 떠오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그 기사의 영상 아래 댓글에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당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몸이 아닌 마음에 장애가 있는 것이다.' 하는 내용의 많은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제일 처음 이 문제가 이슈화 되었을 때는 '저건 좀 아니지 않나.. 저렇게 까지 해야 할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찾아보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래서 그분들이 이렇게까지 밖에 할 수 없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서 '악플도 관심이 있어야 단다, 그 또한 나에 대한 관심이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아마 그분들은 악플이라도 좋은 관심을 받기 위해 지하철로 나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글을 읽으며, 그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들이 주장하는 그 권리가 무엇인지 한번을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을 좋다, 잘했다 하고 평가할 순 없지만 김스피님이 말하신 것 처럼 부딪히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저 그 행동이 잘못 되었으니 나는 너의 말을 듣지 않겠다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의 글이 참 저의 생각을 많이 정리하게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김스피 = 깊은 생각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터를 쓰고 나서도 곰곰 생각했는데요. 사실 ‘공감할만한’이라는 말은, 그 단어를 쓰는 순간 - 말하는 사람에게 ‘공감할만한지 아닌지’ 판단할 권력을 슬며시 쥐어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어떤 사람들은 최소한의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사회이고, 일단은 맥락을 충분히 살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